10. 천주교 일제의 회유방법 시리즈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한 이후 일제는 한국 그리스도교계에 회유와 통제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일제가 한국 그리스도교계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한국에서 그리스도교는 국권회복운동의 온상이었고, 그리스도교학교들에서는 구국교육운동이 전개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한국의 그리스도교계를 외국인 선교사들이 관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사실상 한국의 주권이 일본에 넘어가자 재한 선교사들은 불안해 하였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은 선교사들에게 한국 통치에 대한 협력을 요구하였는데 한국천주교회의 최고 통치권자였던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도 통감 취임석상에서 조언을 부탁받았다. 뮈텔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오랜 동안 선교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였고, 많은 선교사들이 몰래 입국하였노라고 말하였다. 이등박문은 이 말에 미소를 지어보였다.(『뮈텔주교일기』 1906년 3월 28일자.)
뮈텔은 선교사수 44명만을 이야기함으로써 10명의 한국인 신부를 선교사와 같은 범주의 성직자로 인식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조선왕실 통치하에서 선교사들이 오랜 동안 종교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였다는 말을 함으로써 조선통치에 대한 불만, 일제통감부하에서의 종교자유에 대한 희망을 드러냈다.
그러나 일제는 선교사들에게 회유의 몸짓을 하면서도 경계심을 분명히 표현하였다. “일본의 압박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자가 와서 십자가에 모여 십자가 보호 밑에 크게 세력을 양성하여 장차 십자군병을 일으켜 일본의 세력을 한국에서 축출하자는 데” 한국그리스도교회는 목적이 있다고 규정하였다.(『일본공사관기록』.) 이때 이등박문이 강조한 것은 정치와 종교의 상호불간섭이 아니라 종교의 정치불간섭이었다. 종교가 정치에 간여하지 않고 비정치적인 ‘순수한 교화활동’에 전념할 때 비로소 정치와 종교의 협력관계가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종교의 철저한 탈정치화(脫政治化)가 강조된 것이다.(李進龜, 1996 「종교자유에 대한 한국 개신교의 이해에 관한 연구 : 일제시대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박사학위논문.)
을사조약을 전후한 시기 한국에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일제와의 협력없이 한반도 내에서의 선교활동은 그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지도급 감리교선교사들은 일제에 선정(善政)을 희망하고 협조하는 자세까지 취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이틀 후인 11월 19일 서울에서는 장로교와 침례교‧감리교가 연합으로 위국(爲國)기도회를 연일 열기로 하였다.
뮈텔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천주교선교사들이 개신교선교사들보다 열악한 위치에 놓이지 않을까 우려하였다. 개신교선교사들이 일본과 각종 조약을 맺고 있던 영국과 미국 국적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이 개화하는 데 미친 일본의 영향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리고 한국인 천주교신자들은 일제통치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하여 현실에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고통을 겪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적이 아닌 개인적인 기록에서는 일제의 행위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평가하였다. 을사조약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파렴치한 칙령”이라 평가하였다. 일본에 대한 뮈텔의 비판적인 시각은 그의 모국 프랑스와 일본의 관계에서 그 원인이 찾아진다. 프랑스는 보불전쟁에서 패전한 후 독일의 재침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러시아와 협상하였다. 1891년 러불동맹이 기정 사실이 되자 재한 선교사들의 친러노선은 확실해졌다.(최석우, 「일제하 한국천주교회의 저항운동(2)」, 『가톨릭신문』 1988년 3월 20일자.) 뮈텔은 러시아공사 슈피에르(Speyer)로부터 러시아가 한국을 점령할 경우 천주교회를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뮈텔주교일기』 1896년 1월 26일자 및 27일자.)
재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친러배일노선이 노골화되자 일제는 그들을 축출할 계획을 세우고 교황청을 상대로 그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이등박문은 재한 프랑스 선교사들이 한국인 신자들에게 친러배일정신을 주입시키고 있으니 다른 선교회의 선교사들로 대치시켜 줄 것을 교황에게 서신으로 요청하고, 직접 로마로 가서 교황을 만나기까지 하였다. 이등박문의 교황 방문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가고 있는 한국의 상황, 한국의 지배자가 일본이라는 것을 교황청과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인식시키기에 충분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보다 앞선 1902년 1월 30일 영일동맹이 체결되었다. 이는 러시아에 대한 영일양국의 군사적 조치였으며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략을 영국이 지원하는 담보였다. 프랑스는 러불동맹으로 러시아를 재정적으로 지원할 가능성이 있었다. 프랑스정부의 의도야 어떻든 프랑스의 한반도 진출은 러시아의 진출과 마찬가지라는 인상을 영국과 일본은 받게 되었다. 그런데 재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배일운동은 그 자체에 의한 필요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그들 국가의 정책에 기인하였다. 따라서 국가가 그러한 정책을 전환하게 되면 선교사들도 다시 그 정책을 따르게 될 위험성이 없지 않았다.
- 尹善子, 「일제의 한국강점과 천주교회의 대응」, 『韓國史硏究 제114호』, 한국사연구회,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