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11. 일제가 천주교를 회유한 방법 두번째

가보자고911 2023. 11. 2. 03:38

 

두번째 시리즈 방법 일제가 천주교 회유방법 

 

 

 

한국천주교회가 정교분리 선교정책을 채택한 데에는 이러한 이유 외에도 선교사들의 모국인 프랑스와 선교를 총괄하는 교황청으로부터 이중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점, 한국천주교회의 박해 체험, 천주교회의 조직 특성과 신앙구조 등 여러 요인이 복합되어 있었다. 천주교회는 <경향신문>을 통해 정교분리원칙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교회지도부가 채택하였던 정교분리 선교정책은 교회의 정치참여 모두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존의 정치질서를 옹호하거나 정치권력을 지지하는 활동은 인정하되, 반체제적이거나 현실정치를 비판하는 것은 안 된다는 다분히 체제옹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힘의 균형이 깨진 상태에서의 불관여‧중립적 태도란 강자를 두둔하는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강화되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천주교회의 대응방법은 교육과 언론을 통한 계몽이었다.

 

 

학교 설립의 붐을 타고 천주교회도 새로이 학교를 설립하고 기존의 소규모 학교를 개편‧발전시켰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한국인 성직자들은 강한 민족의식과 시대정신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들에 의하면 한국인 성직자들이 민족사에 동참한 방법은 대부분 온건한 계몽의 방법이었다. 천주교회는 <경향신문>의 논설란을 통해 교회의 교육관을 여러 차례 표명하였다. 교육은 개인의 일생을 좌우할 뿐 아니라 가정과 국가, 사회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는 천주교회가 전개한 교육운동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이는 교회의 교육운동이 원래의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였으며, 당시 한국사회가 필요로 하는 교육을 수행하는 데 미흡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운동과 더불어 을사조약 체결 이후 한국천주교회가 전개한 또 다른 계몽운동은 언론을 통해서였다. 교회지도부 차원에서의 계몽운동으로 교육과 언론을 들 수 있다면 신자들 차원에서의 계몽운동으로는 국체보상운동을 들 수 있다. 이 운동은 활동방향에 계몽운동을 표방하였지만 보수 성향에서 완전히 탈피할 수 없었으며 국권회복운동에도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권대웅, 「한말 경북지방의 사립학교와 그 성격」, 『국사관논총 58집』, 1994.) 그러나 천주교신자들이 주도한 이 운동은 강점 이전 계몽운동 차원에서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다.

 

- 尹善子, 「일제의 한국강점과 천주교회의 대응」, 『韓國史硏究 제114호』, 한국사연구회,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