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일제 치하 천주교 회유방법 완결
신‧구교를 막론하고 1910년 한국에서 활동 중이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일제의 한국 강점을 지지‧묵인‧방조하였다.
한국인 신자들에게는 일제에 반항하지 말 것을 권하였고(Samuel Moffett, The Christians of Korea, New York : Friendship Press, 1962, 67p.), 만일 정치적 경향성을 나타내면 교회의 책임있는 위치에서 멀어지게 하였다.(노치준, 『일제하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62, 72p.) 선교사들의 주된 관심은 한민족의 운명이 아니라 선교활동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느냐였다.
일제의 한국 강점에 뮈텔은 당연한 귀결이며, 한국의 애국지사는 일제에 대항할 힘이 없기 때문에 불가항력의 상황을 깨닫고 굴복한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폈다.
드망즈 주교 역시 “합병이 한국인들에게 전에 경험하지 못하였던 안정을 가져왔다”는 역사인식을 보여주었으며, 한국은 “일본과의 합병에 의해 물질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한국인 성직자들은 선교사들과 같은 생각이 아니었다. “나라를 잃어버린 슬픔에 나는 낙심하였습니다”라는 한국인 성직자의 외침은 11명의 한국인 성직자, 그리고 한국인 신자 모두에게 해당되었을 것이다.(손성재[孫聖載] 신부가 검수에서 뮈텔 주교에게 보낸 1910년 12월 31일자 서한.)
한국을 강점한지 12일만인 1910년 9월 10일, 총독부는 종교적인 내용으로 국한하지 않는 한 신문 발행을 계속할 수 없다고 경향신문사에 통고하였다. 경향신문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천주교회와 민족운동이 관련된 안악(安岳) 사건이 발생하였다. 안명근(安明根)은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간도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고 자금조달을 위해 국내로 들어와 안악과 신주(信州) 등에서 모금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안명근의 체포에는 빌렘 신부와 뮈텔 주교가 관련되어 있었다. 안명근이 독립자금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빌렘이 뮈텔에게 알리고, 뮈텔이 총독부에 알림으로써 체포된 것이었다.(『뮈텔주교일기』 1911년 1월 11일자.) 당시 교회는 진고개 토지문제로 일본인들과 법정소송에서 두 번이나 패소하였는데 이 문제를 해결할 교환조건으로 정보를 제공한 것이었다.(김진소, 「일제하 한국 천주교회의 선교방침과 민족의식」, 『교회사연구』 11,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대구교구를 설립하는 1911년 4월 8일자 문서에서 교황 비오 10세도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명시하였다. 조선교구의 분할 및 대구교구의 신설, 드망즈의 주교 임명을 알리고 주교 취임식에 총독과 총독부의 직원들을 초대하기 위해 방문한 자리에서 뮈텔은 주교 취임식 날의 혼란을 막기 위해 경찰이 필요하다며 총독부에 도움을 청하였다.(『뮈텔주교일기』 1911년 5월 24일자.) 그러나 총독부의 반응은 교회에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총독은 물론 총독부의 직원들도 제물포항의 기공식을 이유로 6명밖에 참석하지 않았다.(『뮈텔주교일기』 1911년 6월 11일자. 그런데 천주교회의 기관지에서는 총독부의 고위관리들이 대거 참석했다고 보도되어 있다. 『京鄕雜誌』 269, 1911.)
선교사들은 천주교의 순명을 들먹이며 신자들에게 일제의 지배에 순종할 것을 권하였다.
(『京鄕雜誌』 19, 1911 912년 8월 메이지(明治) 천황이 사망하자 기도문을 반포하며 국상이니 애도하고 장례일까지 매주일 성당에 모여 기도문을 바쳐야 한다고 신자들에게 명하였다.(『京鄕雜誌』 337, 1912년 8월 15일자.) 그러나 교회의 이러한 협력에도 일제의 그리스도교 규제는 계속되었다. 그리스도교 규제는 그리스도교 후원자인 서구세력에 대한 규제를 의미하였다. 그리하여 일제가 채택한 그리스도교 규제 방법은 그리스도교를 한국 문제와 유리시켜 일제의 한국 지배에 그리스도교 세력의 간섭을 배재하는 것이었다. 포교규칙과 개정사립학교규칙은 일제를 향한 선교사들의 기대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이제 선교사는 물론 공소신자들도 총독부의 허가 없이는 선교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천주교회는 이러한 종교규제법령들을 수용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선교사들이 징집되고 선교후원금이 감소 내지 중단되어 선교인력면에서 그리고 선교자금면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교회 설립을 규제하는 포교규칙에 천주교회는 강력 대응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교회지도부의 그러한 태도는 현저히 감소된 교세증가율로 나타났다. 국권이 강탈당하는 위기 상황에서도 선교사들은 초월적이고 내세적인 신앙을 고취시키는 데에만 관심을 두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태도는 정교분리라는 차원을 넘어 한국교회가 사회무관심주의로 흐르게 하였고, 민족사에 동참하는 것을 억제하였으며 한국천주교회의 비민족화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종교는 체제유지의 능력 뿐 아니라 개혁과 변동의 능력도 가진다.(오경환, 『종교사회학』, 서광사, 1979, 258p.) 초기의 한국천주교회는 이러한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전통 사회질서의 해체와 근대사회로의 촉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후 체제유지에만 관심을 갖고 개혁이나 변화를 위한 어떠한 활동도 금기시하고 억압하였다. 이는 교회 스스로가 자신의 예언적 기능을 포기하였다는 의미이다.
- 尹善子, 「일제의 한국강점과 천주교회의 대응」, 『韓國史硏究 제114호』, 한국사연구회,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