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알바니아 만난 조선인 역사
1924년 10월 1일 <개벽> 지에 게재된 독일 유학생 박승철의 기행문에서 발췌한 부분입니다.
1922년 독일 베를린 대학으로 유학을 간 박승철은 1924년에 50일 동안 독일,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터키에 이르기까지 중유럽과 남유럽 일대의 국가들을 다 둘러보는 여행을 했고, 이 과정에서 이전엔 조선인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았던 지역들도 가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로 가는 항해 도중 선박이 잠시 알바니아 항구에 정박하는 일이 있었는데, 여기서 박승철은 마침 본국으로 돌아가던 알바니아인 청년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어쩌면, 조선인 중에선 처음으로 알바니아란 국가와 그곳의 사람을 만난 사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3일 간의 해상 생활
5월 1일 오후에 이태리(伊太利, 이탈리아)를 떠나서 4일 오전에 피로이스(필로스) 항에 도착하였으니 이 항해 일자가 3일은 되는 것이다. 피로스와 아전(雅典, 아테네) 간은 경인(京仁, 경성과 인천) 간 거리보단 더 가깝고, 전차가 연속 부절(不絶, 끊임없이 계속해서)히 달린다.
이곳 말은 요령부득(要領不得, 말이나 글의 요령을 잡을 수 없음)이오, 일자무식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니 이를 어찌 하랴. 해상에서 견문하던 것이나 몇 가지 적어 보자.
알바니아에서 세번째로 큰 항구 도시인 블로러의 위치
익일(다음 날), 조조(早朝, 이른 아침/새벽)에 알바늬아국(알바니아)) 볼노나(블로라, Vlorë)에 도착하였다. 언어가 불통(不通)하는 것은 물론이지만은 풍속도 이상해 보인다.
항구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보더라도 그 얼굴이 누르고 코가 높지 않고, 머리가 검은 것을 보면 동양인에 근사하고, 의복으로 보더라도 중부 구라파인(歐羅巴人, 중유럽인)의 것과는 아주 딴판이다.
조선 의복 비슷하게 저고리와 바지를 하여 입었고, 가죽 한 조각으로 신을 하여 신었으니 발바닥에 가죽을 대고 노끈으로 칭칭 얽여 매였다. 선상에서 건너다만 보고 상륙은 아니 하엿다. 이 사람도 구주인(歐洲人)이며 이곳도 구주(歐洲)인가 하는 생각도 난다.
(1920년대 알바니아인의 전통 복장)
개항지라야 보잘 것 없고 집이라야 양철로 덮힌 2층 집뿐이며, 산야라야 풀 한 포기 없는 먼지가 풀풀 나는 적토(赤土, 붉은 산화철이 들은 흙)뿐이다. 이 나라에는 기차도 없고 전차도 없으며, 신식 교통기관이라야 자동차 밖에 없으며, 목장이나 농업으로 살아가고 조그마한 공장 하나를 자기 손으로 할 줄 몰으고 외국인 기사의 손을 빌게 된다고 한다.
지방이라야 약 2만 8000 평방미돌(平方米突, 평방미터) 밖에 아니 되고 인구라야 80만(한용(悍勇, 사납고 용맹스러움)키로 유명) 밖에 아 되며 전부가 회회교도(回回敎徒, 이슬람교도)라고 한다.
선중에서 알바니아 청년을 만났다, 그는 오지리국(奧地利國, 오스트리아) 유이납(維也納, 빈)에서 공부하다가 귀성하는 청년이엿다. 그는 알바니아국 사정을 자세히 말하여 주었다.
(* 당연히 조선어나 알바니아어가 통했을 리는 없고, 둘 다 독일권 국가에서 유학한 사람이니 독일어로 대화했을 듯.)
약 500년 간이나 토이기(土耳其, 터키, 즉 오스만 제국) 통치 하에 있다가 서력(西曆) 1912년에 독립국이 되었으나, (...) 명실이 상합치 못하였고 다시 서력 1917년 이탈리아의 후원 하에 독립국이 되였으나, 그 간 희랍(希臘, 그리스)와 새이유국(塞耳維國, 세르비아)의 연이은 간섭에 두통이 심하였고 대전 후에 그리스도 국토를 조금 떼어가고, 세르비아도 어떤 지방을 점령케 하여 그 지방의 인민들은 종교로 다툼이 끝이날 적이 없고 이 사정을 알면서도 약소국 알바니아는 감히 말도 할 수 없으며, 말이 독립이지 이탈리아의 간섭이 너무도 심하며 이것 역시 분하지만은 감히 이탈리아에 반항할 수 없는 사정이다.
최근에 일어난 국수당(國粹黨)의 동란도 이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나 세르비아 하나는 두려울 것이 없으나, 그 둘이 연합하니 무섭고, 그 외에 소위 강대국의 후원이 있으니 꼼짝할 수가 없다고 한다.
알바니아 정부는 전력을 다하여 선진열국에 유학생을 보낸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의) 빈에만 하여도 30명이나 되며 그들의 취학하는 경항을 보면 법률, 경제가 다수이며 의학이 기차(其次, 그 다음)이며 공업이 극소라고 한다. 현대 국가 생활에는 공업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은 알바니아 정부도 이 점에 매우 유의하여 유학생을 권장하나 어쩐 일인지 늘 소수가 된다고 한다.
세계의 풍운은 개이지 않았다. 적어도 유럽의 풍운은 이리저리 뭉쳐 다닌다. 인류 사회에 국가 제도라는 강력과 종교라는 인심을 융화도 하고 감정을 격동도 식히는 묘물(妙物, 묘한 것)이 유지되는 금일(오늘날)에 전쟁이 없으리라고 하는 것은 몽상이다. 베르사이(베르사유) 평화조약이 유럽의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못되는 것이다.
유럽 열국의 역사를 읽어 보아라. 전쟁 후에는 평화조약이 있었고, 평화조약이 있은 뒤에는 전쟁이 있었나니, 이것으로 보면 평화조약이 전쟁을 방지하는 것이 못되고, 전쟁를 일시 중지하는 효능 밖에 없었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 세계대전의 원인이 여러 가지에 있다고 하여도 역사적으로 생각해보면 전세기 15년대(1815년) 세력 균형주의에 중독된 구주열국위원(歐洲列國委員)들이 체결한 조약(아마 빈 회의를 말하는 듯)에 잠복해 있었나니, 이러한 조약에 불평을 가진 나라가 약소국들이며, 알바니아 같은 나라였다.
세계의 평화를 바라지 말어라.
이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일)이다. 유럽의 현세를 보아라. (...) 나도 남의 이야기 같이 하지만은 우리의 과거가 그러하였고 현재가 그렇지 않은가. 알바니아인인 그 청년이나 조선인인 나나 그 사정과 그 경우가 무엇이 다르냐. 유럽 전쟁이 있게 된다면 발칸 반도에 있는 어떤 약소국이든지 다시 그 도화선이 될 것도 같다. 마치 아해 싸움이 어른 싸움되듯이. 이욕(利慾, 이익)에만 눈이 밝은 강대국들이 좌시하지 않으리라.
(이 뒤에 알바니아는 어떻게 되었냐면, 1922년부터 총리, 대통령을 지내던 아흐메트 조구라는 분이 1928년 조구 1세로 즉위하여 나라를 왕국으로 바꿔버렸다. 이렇게 해서 알바니아 왕국이란 이름으로 1939년까지 가다가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침공으로 나라가 점령되고 조구는 프랑스로 망명갔다. 이후 엔베르 호자가 이끄는 공산주의 세력이 일어나 파르티잔 활동을 벌인 끝에 1944년 자력으로 추축국을 몰아내고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을 수립했으며, 조구는 왕위를 되찾지 못하고 1961년 망명지에서 사망했다.)
이 항로가 조금 험악하다는 것은 듣던 말이다. 과연 그 말과 같이 오후 3, 4시 경이나 되야서 금파(金波, 금빛 물결)이 일며 선체가 요동하기 시작하더니 석반(夕飯, 저녁식사 시간) 시에는 식당에 나온 사람이 희소하였다. 동행 김형(金兄)도 식사를 하다가 바깥으로 나아가서 누워 버렸고, 식당에는 알바니아인과 나와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여가면서 저녁 식사를 마쳤다. 아닌 것이 아니라, 나도 심기는 불편하였다. 그 정도가 조금 넘었으면 역시 눕지 않고는 못견디었을 것이다.
코린도(코린트) 운하가 무너져서 그리스 전반도(全半島,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돌게 됨으로 1일이 늦게 되었다. 연안에 별로 볼 것 없고, 그리스 남단 해안에 있는 독제의 이궁(離宮, 태자궁)은 대전 시에 불군(佛軍, 프랑스군)에게 결단나고 말았다. 장산(壯山, 웅장하고 큰 산)도 보이지 않고 평야도 (눈에) 띄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