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프랑스가 일본과 협정을 맺고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용인하였다.(최석우, 「일제하 한국천주교회의 저항운동(1)」, 『가톨릭신문』 1988년 3월.) 1907년 프랑스는 한국에 새로 부임하는 베랭(Berie) 영사에게 보호 상태의 국가에 주재하는 프랑스 외교관은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보호 상태의 국가가 보호하는 국가를 상대로 시도하는 행위를 어떤 이유로도 도와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주었다.
불일협약을 맺은 1907년 일제는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킨 후 정미 7조약을 강요하였다. “한국이란 나라는 이제 끝입니다”라고 뮈텔은 표현하였다. 따라서 이후 한국의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 일제를 대하는 뮈텔의 태도는 상당한 변화를 보였고, 그의 변화는 한국천주교회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당시 한국천주교회의 유일한 최고 통치권자였기 때문이다. 의병을 약탈자 내지 산적으로 보았고, 의병운동을 ‘노략질과 강도질’로 인식하였으며, 의병들의 한국인 약탈이 일본군대보다도 심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국인 성직자들 중에는 의병에 선교사들과는 다른 태도를 보여주는 이도 있었다. 풍수원본당의 정규하(鄭圭夏) 신부는 풍수원에 의병들이 나타나자 격려하고 침식을 제공하였으며, 이런 때문이었는지 풍수원본당의 신자들 상당수가 의병에 투신하였다.
1908년 ‘사립학교령’ 공포에 앞서 부통감 증니(曾禰)소네 아라스케의 성씨가 정치와 교육의 분리를 주장하였다. 사립학교령은 그리스도교 규제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천주교측에서는 사립학교령을 환영하지는 않지만 지키겠노라고 하였다.(경향신문 1908년 9월 18일자.) 한국천주교회는 사립학교령을 불만스러워하지 않았다. 천주교회에서 37%의 학교만을 인가받으면서도 불만스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가를 굳이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이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이 사건 이후 천주교회는 정교분리를 더욱 강조하며 한국인 신자들이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극력 반대하였다. 뮈텔은 이등박문의 암살범이 천주교신자가 아닌가 문의하는 편지에 결코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하였으며, 이등박문의 암살범이 천주교신자라고 보도한 언론에 항의까지 하였다.(『뮈텔주교일기』 1909년 10월 26일~30일자.) 사형을 언도받은 안중근이 신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자 거절하였다.(『뮈텔주교일기』 1910년 2월 14일자.) 이등박문을 처단한 것이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먼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뮈텔주교일기』 3월 4일자.) 안중근에게 종부성사(終傅聖事, Sacrament of Extreme Unction)를 주러 가겠다는 빌렘의 요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뮈텔에게는 일제와의 마찰을 피하여 한국에서의 선교권을 보장받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당시 일반 언론은 그리스도교회의 이러한 태도를 매우 염려하였다. 그리스도교가 국가적인 위기 앞에서 내세주의로 도피하는 데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다.(<황성신문> 1909년 1월 9일자, 논설 「我國기독교의 장래」.) 이후 일제식민시기 내내 천주교신자증가율은 매우 낮았다. 이 시기 일부지역에서는 신자들이 집단으로 개신교에 개종하는 사례까지 발생하였다.(노길명, 「개화기의 한국 가톨릭교회와 국가간의 관계」, 『가톨릭사회과학연구 4권』, 한국가톨릭사회과학연구회, 1987.) 한민족은 자신들이 처한 식민지노예상태에서 탈출할 수 있는 희망을 교회로부터 얻고자 하였을 것이고, 교회가 든든한 보루‧빛이 되어주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회가 보여주는 반민족적이고 은둔적인 모습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것이었다.(문규현, 『민족과 함께 쓰는 한국 천주교회사』, 빛두레, 1994.)
- 尹善子, 「일제의 한국강점과 천주교회의 대응」, 『韓國史硏究 제114호』, 한국사연구회,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