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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1년 이전 역사 헤이그

by 가보자고911 2023. 11. 2.

지난번 박승철의 폴란드 기행문에서 이어지는 글로 이번엔 네덜란드와 벨기에 일대를 둘러본 경험이 담겨 있습니다.

 

네덜란드에선 암스테르담, 헤이그, 로테르담 등지를 여행했고, 강대국 사이에 끼인 중립국으로 풍차와 수로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특징을 잘 포착해 설명해 놓았습니다.

이 중에서 헤이그는 1907년 고종의 밀명을 받은 특사 일행이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 일어난 장소로 조선인에겐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애초에 네덜란드를 방문하는 조선인 자체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기에 만국평화회의장까지 직접 찾아간 박승철은 아예 이준 열사의 유령이 자신을 본다면 정말 기뻐할 것이다라는 묘사까지 남겼을 정도로 안타까운 심정을 표출했지요. 다만, 이준 열사가 할복 자결했다는 내용은 현재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는데, 실제로 이준은 병으로 사망했지만, 당시 국내 매체에선 이준이 비분강개한 나머지 할복했다는 식으로 보도했고, 때문에 일제 강점기 시기에도 이런 자결설이 정설인 것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해아(海牙,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관(萬國平和會議舘)을 찾고

화란(和蘭, 네덜란드), 백이의(白耳義, 벨기에)행은 춘일(春日, 봄철 날씨)가 가장 온화한 3월 하순이였나이다. 이번 여행은 예정하였던 것이지만은 일자로는 1개월이나 일찍 발정(發程, 길을 떠남)하게 되였었나이다. 그것은 동반자 4인의 각자 관계로 그리 된 것이외다.

네덜란드는 전 인구 약 680여만 밖에 아니 됩니다. 베를린에서 급행차로 약 12시간이나 되나이다. 제일 처음으로 정부 소재지인 암스테르담(Amsterdam)을 구경하였나이다. 구주대륙(歐洲大陸, 유럽 대륙)에 놓여 있는 도시로는 상하더이다. 모든 시설이라는 점으로 보아서 조금도 손색이 없더이다. 건축물로 말씀하면 전 연와제(煉瓦製, 벽돌)이어서 독일에서 보는 것보담 굉장치는 못하나 아해 보히고도 상쾌하더이다.

네덜란드는 영법덕미(英法德美,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제국(諸國, empire가 아니라 여러 나라를 뜻하는 말)이 세계에 유명해진 의미에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의미에 있어서 유명하외다. 네덜란드에는 견강 육해군도 없며 거대한 대포도 없나이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온순하외다. 물론 자력(自力)이 없으니까는 유럽 정국에서 유력한 일원이 될 수도 없으며 따라서 파동을 일으킬 수도 없으니까는 온순하고 쉽지 않더라도 가장(假裝, 일부러 거짓 태도를 꾸밈)이라도 하고 있어야 할 것이외다.

독일의 중북부가 평원광야(平原廣野, 평평하고 넓은 들판)뿐 인 줄 알았더니 네덜란드를 보니 독일 이상으로 산을 볼 수 업고 일망무제(一望無際, 아득하게 끝없이 멀어서 눈을 가리는 것이 없음.)한 벌판이더이다.

 

그 뿐 안이라 도처에 수류(水流, 물의 흐름) 없는 곳이 고 네덜란드 독특의 풍차는 이곳 저곳에 벌려 있어서 네덜란드의 풍경을 평하는 사람은 산수가 가려(모양이나 경치 따위가 매우 아름다움)하다는 것보단 거수(車水)가 가려하다 하겟나이다. 네덜란드는 제방과 풍차로도 유명하여진 것은 네덜란드는 지형이 해면(海面, 해수면)보다 얕으외다. 그럼으로 해수를 막기 위하여 제방을 잘하여야 하나이다. 큰 도시에도 보면 가옥 하층은 수중에 잠겼으며 지질이 전부 사석(砂石, 모래와 돌)로 되어 있던 가옥은 씰그러진 것이 많이 보이더이다.

 

(여기서부턴 암스테르담을 방문한 내용)

 

암스테르담은 무수한 섬들이 250여 개의 다리로 연결되었나이다.

네덜란드인은 방어뿐 안이라 다리에도 고심하나이다. 그러고 일월(一朝, 어느 날)에 외국과 전쟁이 있다하면 제방이 네덜

란드에 대한 약점이니 한가지 예는 18세기 경에 영란전쟁(英和戰爭,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있었을 때에 영군(英軍, 영국군)은 먼저 제방 파괴로 수공을 하였었나이다. 네덜란드에 와서 보니 모든 것이 풍성풍부(豊盛豊盛) 하더이다. 가난한 독일에 비하면 별천지 갔더이다. 독일인 중에 한학자(漢學者, 한문학자)가 있다하면 무릉도원이 이곳이구나 하겠더이다. 이 곳에는 흑빵도 볼 수 없고 모든 고통도 없어 보이더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단히 고등(高騰, 높이 오름)하여 독일에 하면 심한 차이가 있더이다.

얼마나 알기 쉬운 물가로 논지(論之)하더라도 독일보담 3배나 더 비싸더이다. 그러나 네덜란드 사람에게는 그리 고통이 되지 않은 줄 밋나이다. 야시(야싲ㅇ)을 구경하고 종로(鍾路) 야시장을 보는 느낌이 있었나이다. 물건을 판매하는 것이라든가 그 중에도 음식점에는 노동자들이 많이 모여 들어서 입식(立食, 서서 먹음)하는 것은 상사점(相似點, 비슷한 점)이며 그 외에 노점도 벌리지 않고 모퉁이 모퉁이 서서 양화(洋靴, 구두) 한켤레씩 들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더욱 가소롭더이다. 네덜란드는 독일과 달라서 밤에도 상점을 열고 일요일에도 생활자료를 파는 점포 외에 기타 상점이 열리어 있는 것을 보았나이다.

(여기서부턴 헤이그를 방문한 내용)

네덜란드 여행의 중심이 되는 흥미는 헤이그에 있었나이다.

 

헤이그(Haag)는 세계에 이름이 높혔나이다. 그 결과의 유무를 물론하고 만국평화회의로 인록(유명)해서 조선 사람의 두뇌에 기억이 남아 있고 최근 대전 후에도 무슨 회의이니하고 떠들어서 구미 열국인에게도 신기억(新記憶, 새로운 기억)을 주었나이다. 시가는 꽤 청결하며 인구는 38만 밖에 아니 되나 왕궁 소재지라 그러한지 꽤 번창하더이다. 서양인의 남녀가 자전거를 타는 것이 신기한 일이 아니지마는 이곳 일요일의 도로에 자전거를 탄 남녀로 행렬을 만드는 것을 참으로 처음 보고 놀래였나이다. 만국평화화의관은 시가 중심을 떠나서 있더이다. 건축한 지 20여년 밖에 되지 않음으로 대단히 선명하여 보이더이다.

내부 구경을 하려 하였더니 대문에 화독법영(和德法英) 4국어(네덜란드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로 당분간 폐쇄라 하였음으로 대단히 낙담되였으나 어찌 할 수 없이 문 앞에 서서 왕사(往事, 지나간 옛일)을 회상하여 보았나이다.

조선과 네덜란드는 고래(옛날부터 지금까지)로 아무 교류가 없었나이다. 따라서 본방인사(本邦人士, 조선 사람)으로서 이곳에 왔었다는 이는 내가 무지하여 그리 한지는 모르나 손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외다. 그 중에 현저한 사실은 서력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이곳에 열렸을 적에 고(故) 이준(李儁) 씨가 조국을 위하여 할복 순국함으로써 열국의 귀와 눈을 놀래킨 것이외다. 이 사실이 있은지 이미 10유여년에 천하는 몇 번이나 분운(紛紜, 어지럽고 떠들썩함)하였으며 선혈은 얼마나 많이 흘렸으며 지도의 색깔는 몇 번이나 변하였나이까. 몇 나라의 제정(군주제)가 폐지되고 민주국이 되었으며 몇 나라의 강토가 멸망되고 영토가 되었으며 몇 나라의 영토가 분할되고 부흥국이 되지 않으였나이까.

 

오늘날에 타인 타사(他人 他事, 다른 사람, 다른 일)을 말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생각하여 보더라도 열루(熱淚, 뜨거운 눈물)이 떨어질 뿐이외다. 

 

고(故) 이준 씨의 유령은 네덜란드 공중에서 방황하면서도 조국을 위하여 애통할 줄 믿나이다. 만약 이준 씨의 유령이 있어서 본방인사(조선인)의 족적이 아주 드문 네덜란드 공중에서 이번 우리를 내려 볼 적에 얼마나 반가웠으리요.

특히 우리가 만국평화회의관 앞에 서서 최경건(最敬虔, 아주 경건)한 마음으로 그 이의 장지(壯志, 큰 뜻)을 추모하였을 적에 그이가 잠시라도 육신을 가질 수 있었으면 그이는 우리와 손을 굿게 잡고 먼저 조국의 현상을 물었을 것이며 우리는 세밀한 사항을 이야기 하고 서로 방성대곡(放聲大哭, 목 놓아 크게 움)하였을 것이외다.

그러나 그이는 벌서 타계(他界, 저승 세계)의 사람이라 우리와는 유지미성(有志未成, 뜻은 있으나 이룰 순 없음)일 것이외다. 나는 문 앞에 조금이라도 너머 물러서서 왕사(과거)를 더 생각하려 하였나이다. 당시의 동지들은 동서에 배회하여 타계인이 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조국을 위하여 분골쇄신(粉骨碎身)하는 이가 있지만은 이곳에 와서 이 만국평화회의관을 보아 고 이씨의 유령을 위로한 이가 없었음은 얼마나 섭섭하였습니까. 물론 그이들 뿐 만 아니라 우리라도 벌써 여러 번 있었을 것인대 이것조차 우리 자의(自意)로 못하는 몸이라 더욱 한심할 뿐 이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