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를 기습 침공하면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 중 하나였던 제2차 세계 대전의 서막이 열렸습니다.
대전의 첫 희생자였던 만큼 폴란드인들은 독일군의 폭격과 학살로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놀랍게도 그 아비규환 속에서 살아돌아온 조선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조선인은 그냥 유학생이나 교포가 아니라 일제 체제 하에서 높은 관직을 맡고 있던 외교관 박석윤이었습니다.
당시 박석윤의 직책은 무려 폴란드 바르샤바 주재 만주국 총영사였습니다.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이 만주국의 외교관직을 맡았다는 것은 박석윤이 상당한 충성심을 지닌 친일파였음을 시사해줍니다. 아닌게 아니라 당장 친일인명사전에서 대표적인 친일파인 이완용은 6쪽, 송병준은 4쪽 정도로 다뤄지는데 박석윤은 무려 5쪽의 분량을 자랑합니다. 게다가 단순히 일제에 협력하는 것을 넘어서서 만주 일대에 밀정을 침투시켜 항일 조직을 와해시키는 공작을 펴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 운동을 탄압하는데 앞장선 악질 친일파의 전형이었고, 만주국 총영사직을 맡은 것 역시도 그런 활약(?)에 따른 일제의 보상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박석윤은 폴란드에 그리 오랫동안 머물진 못했습니다. 1939년 2월 총영사직을 임명받고 5월에 만주국을 떠나 2개월만인 7월 1일 폴란드에 도착했는데, 하필이면 일을 시작한지 2개월도 안되어 독일군의 침공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폭격이 내리꽂히는 바르샤바에서 겨우 탈출했던 일을 다룬 박석윤의 글에선 그가 비록 악질 친일파였을지라도 전쟁의 참화를 몸소 체험해 보았기에 함께 근무하던 폴란드 직원들의 안전을 걱정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부분이 간간히 나오긴 합니다만, 한편으론 폴란드인의 민족성을 패전의 원인으로 꼽으면서 반대로 권위에 복종하는 독일인을 칭송하는 한계도 보이고 있습니다.
동란구주(動亂歐洲)의 제상(諸相, 현황)
전 폴란드 주재 만주국총영사 박석윤(朴錫胤)
1. 삼천리사에서 날더러 동란의 유럽에서 보고 느끼고 체험한 제잡감(諸雜感, 다양한 느낌과 경험)을 써달라 한다.
1년 4개월만에 고토를 밟는 내게 글 쓸 한가한 시간이 있을 리는 만무하나 『삼천리사』와 나와의 이별한 정분을 생각해서도 나는 사양할 수 없어 이에 순서없는 글을 두어 마디 적기로 한다.
내가 폴란드에 있을 때(아마 작년 8월이라고 생각된다) 『삼천리』 한 권이 내 손에 들어왔기에 나는 이역에서 오래간만에 조선글을 대하고 보니 마치 고토의 형제를 대하듯 어찌 반가웠는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게 읽었었다. 그리고 김동환(金東煥) 형*의 꾸준한 열성과, 전시(戰時)하 제난(諸難,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발전해 나가는 『삼천리』에 나는 적지 않은 경의를 그때나 지금이나 늘 표하는 바이다.
(* 함북 경성 출신의 시인이자 언론인으로 도요대학 문화학과를 중퇴한 후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서 근무했으며, 1929년부터 삼천리사를 운영하며 잡지 <삼천리>를 간행함. 1939년부터 본격적인 친일 활동에 나서면서 <삼천리>의 친일 논조가 더욱 강해졌으며, 여러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고 징병제를 칭송하는 글을 신문에 게재,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에 포함됨.)
2. 내가 만주국을 떠나기는 작년 5월인데, 그때 요코하마에서 출항하여 태평양을 횡단해서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독일로, 이렇게 여행하기를 2개월만인 7월1일에 폴란드에 도착하였는데, 집무 2개월만인 9월 1일에 독폴 전쟁이 발발되었다.
폴란드 민족은 슬라브 계통의 족속으로 제1차 유럽 대전(제1차 세계 대전) 직후, 다시 독립해서 그간 20년간의 치정(治政, 통치)의 업적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 폴란드 민족의 결점은 선천적으로 과장이 많은 민족이다. 금차(今次, 이번) 패전의 원인 중의 하나는 이 민족적 결점이 한 중요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한다. 물론 국력이 부족한 것이 첫째 원인인 것이오, 또한 폴란드의 그 특유한 상하 계급의 차별 극심으로 국민단결이 건실치 못한 것도 한 원인일 것이나, 유명무실의 선전적 과장적 태도와, 자기 힘을 과신하는데서 불과 며칠 사이에 나라를 잃고만 것이다. 병력이 부족하면서도 충실한 듯이 정부는 과신(過信) 과장하고, 국민 역시 이 태도를 취하니 국력배양에 노력함이 적을 것은 정한(정해진) 노릇일 것이다.
3. 작년 가을 9월 1일부터 독일-폴란드 간에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9월 3일부터 매일 독기(獨機, 독일 비행기)는 오전 5시부터 오후 7시까지 정각적(正刻的)으로 연속해서 폴란드 수도 왈소(바르샤바)를 공습해왔으며, 그때 폴란드 비행기는 전부 1천3백기(機)로, 개전 이후 3주일에 8백기는 독일 비행기에게 파괴되고, 2백기는 도망, 3백기만이 남아서 항전했었다.
나는 농성 3주일 만인 9월 21일에 독일군 측의 권고에 의해서 수도 바르샤바를 탈출했는데, 그때는 이미 폴란드 정부의 모든 기관은 수도를 포기하고 타지로 도피했을 때였다. 처음 독일 전투기가 내습(來襲)하였을 때 폴란드 측에서도 상당히 완강하게 항전하면서 고사포로 사격했으나 독일 전투기를 세 대밖에 격추시키지 못했다고 하며, 나도 바르샤바에서 독일 전투기를 한대만을 확실히 떨어트리는 것은 목격했었다.
대개 새벽 세시나 네시에는 양군이 휴전상태에 있다가도, 새벽 다섯시만 되면 꼭 시작하는데, 마치 무슨 시간 약속이나 있는 듯 싶었다.
4. 나는 농성 21일간 실로 몇 번이나 죽을 뻔했으며, 탈출하자해도 수도 바르샤바가 독일군에게 포위되어서 맹렬한 격전 중이었으므로 도무지 나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한때는 죽음까지도 각오하다시피 되었고, 지하실에 몸을 피해가면서 겨우 생명을 보전했으며, 아침이 되어 거리를 내다보면 포도(鋪道, 포장한 길) 위에 시체가 막 느러저 있고 군마(軍馬)가 쓰러저 죽은 그 처참한 광경은 진실로 형언할 수 없는 극에 달했었다. 병정들은 거리 거리에 쓰러저 있는 수없는 시체들을 되는 대로 막 파묻는 것이라든지, 또는 시내에 비오듯 쏟아져 들어오는 포탄, 특히 대포의 탄환의 파열과, 공습에 의해서 맹렬히 일어나는 화재는 그야말로 화해(火海, 불의 바다)를 일으켜서 문자 그대로 「사(死, 죽음)의 길」이었다.
어떤 날은 하루에 약 3천명씩 수도 바르샤바에서 사자(死者, 사망자)를 내여으며, 그러한 날은 독일 비행기도 3백여기가 편대하여서 내습한 것이다. 이러한 속에서도 사람이란 생(生, 삶)에 대한 애착심이 강한 것이여서 포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것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곡점(米穀店, 쌀 가게) 앞이나 정미소(精米所) 앞에 먹을 것을 사려고 쭈욱 느러선 그 광경은 실로 동정이 아니고는 볼 수 없었다. 사람이란 이렇게까지 삶에 대한 애착심이 강한 것인가 하고 생각하면 사람처럼 무서운 것은 또다시 없다고 느꼈다.
5. 우리 만죽국총영사관 관원 일동이 수도 바르샤바를 탈출하던 9월 21일 날, 고용인이었던 폴란드인 관원과 서로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독일군 진지로 들어가서 독일군의 보호를 구해가지고 목적지를 독일로 정했기 때문에 부득이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피차(彼此, 서로) 살게 되면 다시 만납시다!』하고, 눈물을 흘리며 달어나던 그들을 생각하고, 죽어도 그들과 같이 달아나다가 죽을 수 없는 슬픔에 우리 역시 인정의 눈물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독일군 진지로 들어가는 때가 가장 위험한 때였는데 천행(天幸, 하늘이 준 다행)히 생명을 보존하게 되어 무사히 독일로 가게 되었다.
그 후 줄곧 베를린에 있다가 전후(戰後)에 다시 한번 폴란드에 가보았는데, 그때 갈라젔던 관원들을 반가히 만나게 되었으며, 한사람도 죽지 않은 것이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폴란드가 없어졌기 때문에 영사관 관원으로 다시 채용할 수는 없으나 후히 대접해서 전부 생활 보전을 시켜주었다.
6. 금차(今次, 이번)의 유럽 대전이 발발되기 전에 나는 화란(和蘭, 네덜란드), 백이의(白耳義, 벨기에), 불란서(佛蘭西, 프랑스), 서서(瑞西, 스위스), 이태리(伊太利,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 시찰하고 얻은 바가 많었으나 시간 관계로 뒷 기회에 밀기로 하고, 독불전(獨佛戰, 독일-프랑스 전쟁)에 있어서 독일은 왜 승리하였느냐 하는데 대해서 한마디 적고저 한다.
독일은 제1차 대전에서 패배한 후, 그들의 머리에는 언제나 복수라는 깊은 인(印)이 치어져 있었다.「어찌해서든지 복수하자!」이것이 그들의 목표요 목적이었으며, 이 무언(無言)의 목표 밑에서 국민은 국가에의 절대복종자였다는 것이 승리의 한 원인인 것이다. 이 국민의 복종적 태도에 국가는 잘 통제되었고, 또한 잘 단결되었던 것이다.
국민은 국가의 재부흥을 위한 국가의식을 굳게 파악하고 모든 고난을 극복하면서 자기 직무에 충성했던 것이 금일의 독일로 하여금 개가(凱歌,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한 것이 아닐까. 물론 앞으로의 영독전(英獨戰, 영국-독일 전쟁)에 있어서 그 승패 여하를 단안(斷案, 딱 잘라 말함)해 말하기는 아직 시기가 이르다 하겠지만 지금까지는 군사적으로 승리의 역(域, 영역)에 있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전시 하이지만 독일은 개전 전부터 통제 하에서 생활해 온 것만치 도모지 혼란한 일이 없고, 전시 이후에 절부제(切符制)가 시작된 것만은 새 제도였으나 물품은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고, 한가지 놀라운 것은 전시 하의 독일에서는 암취인(暗取引, 암거래상)을 도무지 발견할 수 없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독일은 얼마나 잘 통제된 나라이며, 독일 국민은 얼마나 국가를 위한 복종자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당연히 이때는 전쟁 초반이고 독일이 아직 총력전 체제에 완전히 돌입한 시기는 아니었기에 일반 국민들도 일상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