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4월 6일자 <한성순보> 기사엔 프랑스의 국력과 역사에 관한 내용이 자세하게 소개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식민지, 교육 제도, 군사력 등을 수치까지 나열하면서 세세히 설명했는데, 마지막에 가선 갈리아 시대부터 시작되는 프랑스의 역사가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조선 최초로 프랑스사가 대중에게 전달되는 뜻 깊은 순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프랑스에 대한 지략속고(誌略續稿)
(* 지략은 간단히 적은 원고이고, 속고는 전에 쓰던 원고에서 계속되는 원고를 가리킨다.)
옛날 프랑스는 역시 야인(野人, 교양 없고 거친 사람)으로서 오로지 유목을 일삼았으며 이름은 가이(哥爾, 갈리아)라 하였고 인종은 네덜란드와 같았으며 전 국토는 일이만(日耳曼, 독일)의 서부와 함께 일부를 이루고 있었는데 로마 원수(元帥) 해철(該撤, 카이사르)가 그 땅을 정복하게 되었을 때는 그의 판도로 들어갔었고 그 뒤에 로마의 세력이 점점 쇠약해지자 유럽 각부에서는 서로 쫓겨 이주하였기 때문에 이 나라 역시 불란가(佛蘭哥, 프랑크) 인종의 점유하는 바 되었다.
처음에 이 프랑크인의 추장 미라위(美羅威, 메로빙(Merowing))이란 자가 그의 휘하를 거느리고 독일로부터 와서 로마의 주둔병과 이땅의 토착민을 몰아내고 계속 웅거하게 됨으로써 이땅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그의 손자인 가나미(哥羅味, 클로비스(Clovis))에 이르러 마침내 전국을 통일하여 서기 481년에 즉위하여 파리에 도읍을 정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야소교(耶蘇敎, 크리스트교)를 신봉하게 되었고 국가의 모든 법규를 차례로 제정하여 나라의 기틀을 견고하게 도모했는데 다음 위(位, 제위)를 계승하는 자들이 혼미하고 나약하여 스스로 마음대로 국사를 다스리지 못하고 오직 주색에만 바져들게 되니 국가의 권한이 내신에게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서기 757년에 내신인 비비락이(比比諾爾, 피핀(Pippin))이 자칭 왕위를 받았다고 말하고는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아들 사이록만(査爾祿曼, 샤를마뉴(Charlemagne))도 역시 계승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자 자주 군사를 출동시켜서 사방을 침략하여 결국 비리이(比利耳, 벨기에), 화란(和蘭,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 이탈리아 서부와 스페인 북부 등이 모두 그의 판도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때에 와서는 국위를 크게 떨치게 되니 샤를마뉴는 왕위를 발판으로 삼아서 마침내는 제위(帝位,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국인(國人, 백성)들이 그를 높여서 대제(大帝)라고 하였으니 이때가 서기 800년이다.
샤를마뉴의 뒤에 그의 아들 로이(路易, 루이(Louis))가 제위를 계승했으나 너무 용렬하여 다스리지 못하고 국가를 삼등분으로 나누어서 그의 아들들에게 각각 봉해 주게되었다. 이때부터 서로 세력과 이익을 다투게 되어 전쟁을 일삼고 죽이기를 수없이 하다보니 국민들이 모두 불안하게 되었다. 루이가 죽은 뒤에 조정 협의를 거쳐서 국토의 경계를 나누어 각각 한 나라로 했는데 소위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이라고 하는 나라이다. 그 뒤 모두들 봉건제도로서 대소(大小)의 후백(侯伯, 후작과 백작)들로 하여금 토지를 나누어 수령케 하였다. 그렇게 되니 마침내는 병력을 서로 숭상하여 내란의 그침이 없게 되었다.
이로부터 몇 세대를 지나서 서기 880년에 이르러서는 독일의 관할로 속해 있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파리후(巴里侯)가 잠깐 왕위에 올랐다가 또다시 사이록 제삼(査爾祿 第三, 샤를 3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때에 국가의 정통을 점차로 복구하게 되었으나 내란은 끊어지지 않았고 외구(外寇, 외적)도 쉬는 날이 없었으며 또 낙만(諾曼, 노르만)이라고 이름하는 해적들이 나위(那威, 노르웨이)로부터 들어와서 자주 해안지방을 엿보니 비록 군사를 동원하여 여러번 이들을 토벌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끝내는 두쪽의 해안을 떼어주고서야 강화를 의논하게 되었으니 나위적(諾曼賊, 노르만 해적)이라는 것이 바로 이들이다.
또는 국내의 후작과 백작들이 날로 발호하여 세력이 커지니 국가의 세력은 쇠약하여 져서 위력을 잃게 되었으며 뒤에 무액가반다(武額加頒多, 위그 카페(Hugh Capet)) 후가 왕위를 빼앗아서 전국을 통일하고 다시 도읍을 파리에 정하게 되었으니 이때가 서기 987년이다.
이로부터 몇 세대 지나서 계승된 왕중에 호매표한(豪邁剽悍)한 왕이 있었는데 항상 전투만 마음에 두어서 어떤 때는 십자군(十字軍)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어떤 때는 유태교도들을 학살하기도 하였는데 후손인 사이록 제4(査爾祿 第四, 샤를 4세)에 이르러서는 아들도 없고 가까운 친척도 없었는바 이때 와라의사(瓦羅義斯, 발루아( Valois))의 후인 비립 제6(非立第六, 필리프 6세)가 그의 족제(族弟, 같은 항렬의 아우뻘 되는 남자)로써 왕위를 계승하게 되니 영국왕 의덕와(義德瓦, 에드워드) 3세는 전왕(前王, 샤를 4세를 가리킴)과 인척 지간이기 때문에 대중에게 선언하기를 『나는 프랑스에 군림하여 다스리리라』 말하고 드디어 대군을 이끌어 프랑스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때에 프랑스에도 반적(叛賊, 자기 나라를 배반한 역적)들이 있어서 영국과 힘을 합하므로 프랑스군이 여러번 패하게 되었으나 새로 계승한 왕인 사이록 제5(査爾祿 第五, 샤를 5세)가 특별한 영재인지라 점차로 구세(舊勢, 이전의 세력)을 회복하게 되어 가류파다(加留波多, 칼레(Calais))와 별도의 영채(營寨)인 삼성(三城, 세 개의 성)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돌려받아 소유하게 되었다.
영국 군병(軍兵)의 침략을 받은해부터 이제까지의 기간이 무릇 90년 동안에 겨우 영병(英兵, 영국병)의 난은 멸할 수 있었으나 다음에 계승한 왕인 사이록 제6(査爾祿 第六, 샤를 6세)가 또 혼미하고 나약하며 뛰어나지 못해서 다시 영국병의 공격을 받게 되어 드디어는 그들의 무릎 아래 항복을 빌게 되었으며 또 항복조약에 말하기를 『지금 왕이 죽은 뒤에는 마땅히 왕위를 영국왕에게 전하겠다』고 하였는데 서기 1423년에 왕이 죽고 샤를 7세가 마침내 왕위에 오르고 전의 조약을 실천하지 않게 되자 그 때문에 또다시 영국병의 공격을 받게 되었으며 도망해서 가이량(哥爾良, 오를레앙) 부에 왔을 때 영국병이 바로 들이닥쳐서 그를 포위하게 되었다. 이때에는 국내 모든 곳이 전부 영국병의 관할하에 들어갔는데 뜻밖에 이름을 여안달(如安達, 잔 다르크)이라고 하는 한 여자가 민간 중에서 일어나 스스로 신명(神命)을 받았다고 자칭하고는 의병을 징집하여 왕을 포위 속에서 구원하여 예무수(例無修, 베르사유(Versailles))의 땅에 이르러 즉위의 예(禮)를 거행하게 되니 이때에 국내의 각계 사람들이 모두 서로 다투어 왕을 돕게 되어서 가뢰성(加雷城, 칼레를 가리킴)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프랑스의 소유로 복귀시켰다. 이때부터 계속해서 국세를 점차로 떨치게 되어서 때로는 후작과 백작들의 권력을 박탈하고 때로는 오국(墺國, 오스트리아)과 위니서(威尼西, 베네치아) 등의 국가들과 난을 일으켜서 교전하기도 하였다.
서기 1519년 국왕 불랑사(佛郞士, 프랑수아(François)) 1세가 스페인 왕 사이락 제5(査爾祿 第五,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5세)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결국은 여러 해 동안 서로 싸우면서 승패가 오고가기만 했다.
대개 당시 유럽 전역에서 정세의 변함에 따라바꾸어가면서 기회를 타게되니 흥하고 폐함이 일정하지 못했고 또 예수교도 신구 양파로 나뉘어서 각기 당파를 세워서 서로 공격하기 때문에 내란이 계속되어 국가에는 평온한 해가 없었다. 1589년에는 이때 왕이 현리(顯理, 앙리) 3세였는데 자객에게 죽음을 당하여 왕위를 게승치 못했고 부리분(不爾奔, 부르봉(Bourbon)) 공(公)이 앙리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때부터 왕통을 칭하는 것은 부르봉 가였다.
부르봉의 사람됨이 민첩하고 그릇이 큰데다가 특별히 농상(農桑, 농업과 잠업)과 제조 등에 힘을 쏟아서 쇠퇴를 만회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마침내는 폭객에게 시살 당하고 말았으니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아들 로이(路易, 루이) 13세는 어리고 재주도 없었는데 이때 재상 이세류(李世柳, 리슐리외(Richelieu))가 섭정을 하면서 내정과 외교에 이르기가지 능란한 솜씨로 학교를 일으키고 국세를 떨치었다.
루이 14세는 5세에 즉위하여 재위 73년간에 토목업을 번창시키고 병력에 대해서도 힘을 썼으나 밖으로는 원수진 나라가 많고 안에는 민원(民怨, 백성의 원망)이 그치지 않았다. 재상 골별사(骨別士, 콜베르(Colbert)) 같은 사람은 나라를 잘 다스릴만한 자격도 있었지만 국재(國財, 나라의 재산)을 능란하게 경리(經理, 경영하고 처리함)하지 못했다. 뒤에 부르봉 계통이 끝내 멸망하게 되는 것도 모두 이번 왕 때에 징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1715년에 루이 15세가 비록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세운을 만회하지 못하고 당시 귀족교도들이 권력을 독차지하여 모두들 제멋대로 국재를 엉뚱한데 써버리고 평민들만 들볶으니 상하의 마음이 서로 어긋나 결국은 정치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1774년 루이 16세가 뜻을 가다듬고 정치를 장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니 현명한 왕이라고 할 수는 있겠으나 아깝게도 결단력이 보족하여 쌓인 폐습을 한 번도 씻어버리지 못한채 마침내는 자신을 죽이고 집을 망하게 하였으니 후인(後人, 뒷 세대)들이 어찌 거울삼아 경계하지 않겠는가.
1791년 홍유석(鴻儒碩)의 무리가 나와서 사민동등(四民同等)의 설(說)을 다투어 부르짖게 되었고 평민들 역시 그 설을 찬동하게 되었는데 이 설은 귀족 교도들의 방자하게 마음대로 지껄이는 학문에는 매우 거리낌이 되었다. 이때는 마침 미국 독립의 거사가 일어나고 있을 때라 프랑스인들이 출병하여 그들을 구원하게 되었는데 미국이 평정된 뒤에 프랑스병들이 미국으로부터 돌아오게 되었고 백성들이 모두 미국인의 자주권을 칭송하게 되어 국왕으로 하여금 군민이 동치(同治, 함께 통치)하는 정부를 설립하게끔 하고자 했으나 귀족교도들은 이것을 좋아하지 않아 서로 파당을 만들어 저항한 것이 오래 되었다.
그러나 평민은 많고 귀족교도는 아주 적기 때문에 본래 적은 것이 많은 것을 상대할 수 없는 법이다. 끝내는 귀족들도 피폐하게 되었고 교도들 또한 좌절하게 되어 봉건제도가 폐해지고 다시는 거론하지 못했다. 그래도 오히려 만족하지 못해서 마침내는 그들의 군왕(君王)까지 죽이게 되었으니 이때가 1791년이었다.
(* 실제로 루이 16세가 처형된 년도는 1793년)
그뒤에 사민(士民)들이 회의를 하여 합중정치(合衆政治)를 성립시켜 백성 중에서 민망(民望, 백성의 바람이나 믿음)을 가장 많이 얻은 사람으로 대통령을 삼게 하였는데 이 때에 나파륜(拿破侖, 나폴레옹) 1세가 병졸로부터 시작해서 대통령에까지 오르게 되었으며 전국의 병권을 쥐고 이웃 나라들과 여러번 전쟁을 하게 되었고 전쟁에는 언제나 대승하게 되어서 1804년에 제위에 올랐고 계속해서 동으로 정벌하고 서쪽으로 토벌하여 유럽의 전 대륙을 모두 자기의 소유로 귀속하려고 했다. 그래서 북쪽으로 러시아를 치다가 대패하여 돌아왔다.
1814년에 각국이 병(兵, 군사)를 합해서 함께 공격하여 나폴레옹을 지중해의 예루파(例婁波, 엘바(Elba)) 섬에 귀양보내고 루이 16세의 아우를 세워서 왕이 되게 하였으니 이를 이름하여 루이 18세라 하였다. 이때에 각국에서는 전권 공사(全權公使)를 오스트리아의 유이납(維也納, 빈) 부에 모이게 하여 의논하기를 프랑스가 각국의 침략한 땅을 돌려주도록 하려 했는데 다음해 봄에 이르도록 의논을 종결 짓지 못했고 이때에 또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부터 탈출하여 프랑스 수도로 돌아와 국왕을 내쫓고 제위를 회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국의 연합병과 비리(比利, 벨기에)에서 대전(大戰, 크게 싸움)하게 되었는데 화덕로(華德路, 워털루(Waterloo)) 지방에서 또다시 패하게 되어 곧 샛길로 도망하여 프랑스 수도에 이르게 되었는데 각국병(各國兵, 각국의 군대)가 바로 따라와서 그를 다시 포위하게 되었으며 또 바로 나폴레옹을 잡아서 삼와리내도(三厄里那島, 세인트헬레나 섬)에 깊게 가두어 버렸으며 루이로 하여금 다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이때가 1815년이다.
그 뒤에 사리(査理(샤를) 10세가 제위를 계승하여 의회와 권력을 다투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내란이 다시 싹트게 되었고 마침내는 왕을 폐하는데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아리안(疴理安, 오를레앙(Orléans))의 후(侯)를 추천하여 국왕을 삼고 그를 이르기를 로이비립(路易非立, 루이 필리프(Louis-Philippe))왕이라 하였으니 이때가 1830년이다.
1848년에 이르러서는 국정이 변해서 합중 정치로 되었는데 국회에서 나폴레옹 3세를 추천하여 대통령을 삼았는데 이 사람은 바로 나폴내옹 1세의 생질이 된다. 이 제 3세가 자리를 계승한 뒤로 점차 인망을 얻어서 드디어는 스스로 제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국가의 부강을 힘써 도모하였다. 마침 이때 러시아와 터기에 틈이 생겨서 싸우게 되었는데 제3세가 영국과 함께 터키를 돕게 되어 러시아로 하여금 화친을 빌게 하였고 또다시 철정방(撤丁邦, 사르데냐)을 도와서 오스트리아를 치게 하여 항상 대승을 거두게 되니 제3세는 유럽 각국으로 하여금 모조리 자신의 덕 밑에 모이도록 하고자 했는데 마침내는 보국(普國, 프로이센)에 꺾이는 바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서 프로이센이 날로 부성해지면서 프랑스와 함께 한 번 겨루어 보고자 했고, 이 때에 우연히 무관으로서 왕위를 상속해야 한다는 논이 있었고 프랑스와 프로이센은 오랫동안 서로 친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3세가 스스로 40만 군대를 거느리고 프로이센과 전투를 하였는데 불리하게 되어 1870년에 마침내 프로이센군에게 사로잡히게 되었거니와 파리 역시 프로이센군에게 함락하게 되었으니 프랑스의 정부에서는 곧 2주(알자스-로렌)의 땅을 떼어주고 또 9억 3천불이 돈을 보상하는 조건으로 프러시아와 화친을 청하게 되었으니 이 때가 1871년이다. 그 뒤 다시 국정이 공화국으로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