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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공립신보 관련해서 조선 재미교포 역사

by 가보자고911 2023. 11. 2.

<공립신보(共立新報)>는 1905년 11월 2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재미 교포들의 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의 기관지로 창설된 신문입니다.

 

창립자는 그 유명한 안창호였고, 주필은 송석준이었으며, 재미 동포들의 민족 정신 고취와 국권 회복 운동을 보도하는데 중점을 둔 언론 매체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일제 통감부 측에서도 해외에서 발행되는 이런 동포 신문들의 기사를 면밀하게 주시하며, 신문의 국내 유입을 철저히 차단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가령, 1907년 9월 6일자의 논설에선 후대 사람들이 보기엔 다소 무리수가 담긴 주장도 나옵니다. 미국의 중재 하에 러일 전쟁을 마무리 지은 1905년의 포츠머스 조약 때 일본이 미국의 방해로 러시아로부터 배상금을 제대로 얻지 못한 데다가 태평양을 둘러싸고 양국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기에 곧 미일 간 전쟁이 발발한 것이고, 그 틈을 타 조선이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요지였습니다.

그렇지만, 비록 일본이 배상금 문제로 불만이 많았다고는 하나 러시아와 전쟁을 끝낸 지 얼마 안된 상태에서 또 국운을 전 전쟁을 벌인다는 건 무리일 뿐더러 이미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필리핀과 조선 양국에 대한 서로의 지배권을 인정해버린 상태였기에, 당시에 미일 전쟁은 실현 불가능한 시나리오에 불과했습니다. 일부 조선인들의 바램대로 실제로 미일 전쟁이 벌어진 건 34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었습니다.

* 1907년 10월 26일자로 외무차관 진다 스테미(珍田捨己) 남작이 통감부의 총무장관 스루하라 사다키치(鶴原定吉)에게 <주미 한국인의 동정에 관한 건>이란 제목 하에 보낸 문서

(진다 스테미는 메이지~쇼와 시대에 일본의 외교관이자 관료로 활약한 인물로서 히로사키 번 무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미국에서 유악한 후 감리교 부목사를 지내다가 외교계에 입문했다. 영국, 조선, 청 영사관에서 직책을 맡았으며, 1890년부터 샌프란시스코의 주미 일본 영사가 되었고, 러일 전쟁 강화 교섭에 참여해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20년엔 파리 강화회의에 일본측 전권 대사로 참여해 그 공으로 백작 작위를 받았고, 말년엔 추밀고문관으로 일하며 히로히토 황태자를 수행했다.)

<한국인의 동정에 관한 건>

 

본건에 관해서는 8월 14일자 공신(公信) 제227호로 말씀드린 사정도 있는바, 공립협회장 송석준(宋錫峻)은 2개월 이전부터 당 연안의 한국인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기부금을 모집하고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1개월 전 캘리포니아주 남부의 리버사이드(River Side)에 이르러 열병에 걸렸으므로 위 협회에서는 정재관(鄭在寬)을 불러들여 송석준을 대신하게 하였던바, 송은 약 2주 전 결국 전기(前記, 앞에 나온) 리버사이드에서 사거(死去, 죽어서 세상을 떠남)한 모양이므로 정이 그 뒤를 이어 현재 사무소를 샌프란시스코 시 오스틴 가(Oustin Ave)에 열고 있습니다.

또한 근래 하와이를 거쳐 이곳에 왔다는 소문이 있는 홍득수(洪得秀)라는 자가 정을 대신하여 동부로 향하게 되었다는 사연을 들었습니다. 또 위 협회가 최근 발간한 『공립신보』 4부를 이에 송부하오니 사열(査閱, 조사하기 위해 살펴봄)하시기 바라며 이에 말씀 올립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공립신보』 9월 6일자 논설>

 

- 일미전쟁(日美戰爭)이 한국에 주게 될 기회

 

옛날 오(吳)와 위(魏) 양국이 적벽에서 전쟁을 벌여 조조(曹操)가 패하므로 한(漢)은 다시 그 사직을 서촉(西蜀)에 보전하였고, 프로이센(普)과 프랑스(佛)가 우단(스당)에서 전쟁을 벌여 나폴레옹 3세가 패하므로 이탈리아(伊太利)가 그 통일을 보전하여 수도를 로마에 정했다. 이를 보면 나라를 회복하며 나라를 중흥할 기회가 없다고 말하지 못할 바로다. 오늘날 미국과 일본의 갈등은 점점 격렬해져 태평양 위에서 양국 군함이 포화를 사이에 두고 바라보게 되는 것은 세계 만국이 모두 주목하는 바이다.

양국정부가 밖으로는 평화를 가장하여 대사(大使)가 서로 왕래하지만, 안으로는 곧 포대를 엄중히 경계하며 육해군을 정돈하기에 급급하다. 다만 양국이 급히 거사하지 않는 것은 미국은 아직 파나마 운하 공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대서양 함대가 동양으로 직항할 수 없다는 것이고, 일본은 재정이 궁색하여 군비가 곤란하기 때문일 뿐이다. 게다가 양국 국민의 행동을 고찰하건대 일본 국민은 모두가 재작년 포츠머스에서 있었던 러시아와의 강화 담판에 미국대통령 루스벨트 씨의 방해로 배상금을 받지 못했다고 하여 악감정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금년 봄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 학생과 노동자를 배척했다는 이유로 미국을 나쁘게 보는 일이 한층 심해지고 있다. 현재 미국 재류 일본인은 비밀리에 군대를 편성하여 4곳의 산림에서 훈련하거나 몰래 정찰을 파견하여 각 항구의 포대 사진을 찍고 있는 이들의 행동은 더욱더 미국인의 분노를 격증시켰다.

원래 미국인은 거만하고 조그마한 수치에도 사생을 걸고 다투는 것이 다반사이므로 겨우 야만의 경력을 벗어난 일본인 때문에 이와 같은 치욕을 감수하는 것을 견뎌내겠는가? 

 

그러므로 일본인에 대한 배척과 협박은 한층 도를 더하여 육지로는 캐나다와 멕시코의 경계에서 연일 잠입하는 일본인 수십 명을 포박하여 이들을 일본으로 쫓아내고, 바다에서는 대서양함대를 태평양으로 돌려보내며 샌프란시스코 부근에서 행하는 각 포대의 연습은 특히 실전과 같다. 이처럼 서로 분노한 양국이 어떻게 평화를 보전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일미전쟁은 아마 이후 3년을 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실로 한국이 독립을 회복할 일대 기회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국민은 모름지기 괄목하고 주먹을 쥐어 시국과 대세를 살펴서 기회가 도래하는 것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 일단 일·미 양국이 서로 싸우게 된다면 일본의 세력은 한국과 만주에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제국인 러시아에게는 승리했지만 어찌 8천만 국민이 거의 병정으로, 게다가 모두가 애국자인 공화국 미국에 대적할 수 있겠는가?

 

 

이때에 있어 우리들 2천만 동포가 합심 궐기하여 일단 정의의 깃발을 펄럭인다면 우리들을 압박하고 학살한 일본인을 쫓아내고 원수를 갚는 것은 쥐를 잡는 것과 같고 토끼를 때려잡는 것처럼 용이하며 능히 한국의 독립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특히 오·위의 싸움에 한이 그 나라를 보전하고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싸움에 이탈리아를 통일한 기회처럼 재회하기 어려우며 만금으로도 살 수 없는 절호의 기회이므로 우리 동포들은 잘 성심을 닦고 용기를 비축하여 기다릴 것을 희망한다.

또한 끝으로 한 마디 덧붙이자면 우리 국민은 원래 의뢰심이 많고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이루려고 하지 않으므로 다만 막연히 일미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돌아가고 미국이 한국을 구조해 줄 것에 의지하여 안심하고 무위로 지낸다면 이는 마치 범을 보내고 사자를 맞이하는 것과 같아 일본의 노예에서 벗어나도 미국의 노예가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므로 우리 국민은 완전히 그 의뢰심을 단절하고 분발하여 자강하기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