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기적을 행하였는가? 이 질문에는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나 성경 학자는 역사가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질문에 가부간 양자택일하여 대답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그는 자신의 학문의 원칙들을 짓밟는 결과가 될 것이다. 설혹 그 성경 학자가 철학적으로 말해서 하느님의 이례적인 개입이 존재한다는 것을 수락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시인하더라도, 그가 자기 권한과 자격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이다. 자칫하면 루르드에서 어느 치유 사실이 기적적이라고 선언하기 위해서 엉뚱하게 주교단의 권위에 호소하는 어느 의사를 닮는 꼴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경 학자는 이 의사와는 달리, 관련되는 서류를 모조리 손에 넣고 있는 것도 아니다. 설사 이 서류를 가지고 있다거나 기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사건을 역사가의 입장에서 다시 완벽하게 복원하여 이야기해 줄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는 예수 당대의 사람들과 비교하여 더 나을 것이 조금도 없다.
그래서 그는 결국은 예수의 동작에 놀라게 되고, 그 뜻이 모호하여 여러 가지로 엇갈리는 해석들을 낳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이와 같은 예수의 동작은 성경 주석가를 이끌어 예수라는 인물과 마주치게 하며, 아울러 그분에 대해서 어떤 태도 결정을 내리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예수라는 인물은 루카 복음서 2장 34절이 말하는 대로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사실 당시에도 예수의 행적을 보고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 1장 27절에서는 사람들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하면서 놀라는가 하면, 6장 2절에서는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하면서 의아해 한다. 그런가 하면 아예 노골적으로 부정적인 판단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3,22)는 것이었다. 따라서 성경 학자가 자기 학문의 이름으로 어떤 기적 이야기의 역사적 진실을 확인해 준다고 한다면, 그는 자기 독자를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이란 강요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 역사적인 조사 연구의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이 문제에 관한 참된 의미의 의견 일치가 성경 학자 각자의 기본적인 태도와는 상관없이 성경학계에서 확인되었다는 것이 놀랍게도 하나의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학계의 이 의견 일치는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예수는 당대 사람들에게 악마 추방자요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간주되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의 행적 중에서도 특히 그의 악마 추방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그의 선포에 직결되어 있었다는 데에 그 본질적인 특징이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가가 예수의 기적이 사실이라든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확인해 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는 당시 사람들이 예수를 사실상 기적을 행하는 사람, 악마 추방자요 치유자로 생각했다는 것만은 분명히 확인해 줄 수 있다.
악마 추방자라든지 치유자라는 낱말이 우리 현대인들에게 별로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런 낱말들에 늘 나쁜 뜻만을 부여하려 든다면 당치 않다. 그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시대착오를 범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성경학계의 이런 견해 일치는 어디에 근거하고 있으며, 기원 후 1세기의 사람들이 기적에 대해서 가졌던 개념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과연 예수의 기적 활동을 헬라 세계라는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 안에 정확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의미는 어떠한 것일까? 요컨대 이렇듯 복잡다단한 주제를 놓고 과연 '역사'라는 것을 쓸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그 범위가 매우 넓다. 그래서 이제부터 소개하려는 종합적인 개관도 간략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이를 더욱 발전시킬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령 기적에 관한 예수의 말씀과 같은, 한 가지 점만을 천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분야에서는 관련되는 자료들이 모두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1. 복음서에 나오는 기적의 문제
1) 기원후 1세기의 기적관奇蹟觀
우리는 흔히 기적을 정의하기를 자연의 법칙에 비해서 또는 그 법칙을 거슬러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능력이 발휘하는 어떤 행위나 작용이라고 한다. 옛날의 유다인 같으면 이런 기적의 정의에 다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우리가 지금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옛사람들이 '표징들semeia', '이적들terata', '위대한 업적dynameis'이라는 말로 가리키던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이 세상, 따라서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직접적인 원인이나 다름없었다. 하느님은 어느 때고 개입하시고 간섭하신다. 그렇다고 그분이 질서를 혼란시키는 것은 아니다. 질서란 그분이 당신 섭리의 계획에 따라 계속적으로 창조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보기에 하느님의 이 계속적인 개입과 간섭이 때때로 이례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나는 것은 당신이 세상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좀 더 특별한 모양으로 드러내고,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하느님을 표시하고 그분을 가리키는 표지 또는 동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 놀라운 일들은 세상의 질서의 한계를 뛰어넘기 때문에 우리의 감각과 상식에 큰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처럼 하느님은 당신의 새로운 뜻을 표징을 통해 알려 주시거나 당신이 보낸 심부름꾼을 사람들이 신임할 수 있도록 그 신원이나 사명을 증명해 주시기도 한다. 또한 선악에 따라 상을 주거나 벌을 내리고 구제도 하신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기적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느님 계획의 확호성 또는 새로운 변경을 드러내 주는 데에, 또는 역사를 점철하는 그분의 구원 개입救援介入에 대해서 그분의 지배권, 그분이 주님이심을 확인해 주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일명 필론이 말하는 바와 같이 기적은 '구원의 표징'이다(《성경 고대사》 27,7; 지혜 16,6도 참조).
하지만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마귀들도 인간 또는 세상에 대한 저들의 지배권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벌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적의 동작이란 그 자체만을 따로 떼어 놓고 볼때 매우 애매모호한 것으로 남게 된다. 기적이란 그것이 지니는 의미로 말미암아 가치를 띠게 된다. 그런데 이 의미는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식별해 내야 하는 것이다. 신명기 13장 2~4절에 하신 말씀 그대로다. "너희 가운데에서 예언자나 환몽가가 나타나 너희에게 표징이나 기적을 예고하고, 그가 말한 표징이나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가 그들을 섬기자.'하고 그가 말하거든, 너희는 그 예언자나 환몽가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기원후 1세기의 사람들에게도 거짓 기적이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마르 13,22; 2테살 2,9). 다만 이 거짓 기적이 지니는 의미는 그가 속해 있는 종교 집단의 확신과 비교할 때 그릇된 것으로 판정되어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대번에 알 수 있게 된다.
기적의 문제는 이 기적을 행하는 사람의 권위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마르 6,2)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주님의 기적 활동을 상당히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 목적은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에는 예수를 핵으로 하는 권능의 전도顚倒를 번역하자는 목적도 있었다. 기적이란 한계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다. 그렇기에 기적은 그것을 행했다고 사람들이 일컫는 그 사람에게 어떤 권능이 있다는 것을 이미 함축한다. 그것은 무엇을 '행한다'는 행위에 속하는 권능이다. 인간의 행동 범위에서도 그렇고, 그 인간을 떠받쳐 주는 세계에 있어서의 어떤 권능이다. 그만큼 인간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 밖에 기적을 말한다는 사실 자체는 곧 인간의 전체적 삶이, 무엇보다도 그 행동에 있어서, 바로 이 기적으로 통해 개입하시는 하느님에 의해서 얼마나 철저하게 지배를 받고 있는지도 아울러 말해 준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자연의 원소들과 그 힘에 관련되는 기적들, 가령 풍랑을 가라앉힌 기적 따위도 좀 더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상관되는 기적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다. 사실 인간은 이 세계와 일체를 이루고 있으며, 하느님의 지배권은 만물에 미치기 때문이다.
결국, 자연 질서에 관련된다는 의미에서의 자연 이적을 치유 이적과 구별한다든가 치유 이적과 악마 추방의 이적을 구별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현대인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구별이다.
사실 치유 이적은 구마, 즉 악마 추방의 이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전승의 실태다. 그 까닭은 이 두 경우 모두 악마의 지원을 받고 있는 악, 곧 죄를 '축출'하는 기적이기 때문이다. 죄는 질병이나 어떤 신체적 결함과 일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요한 9.34). 따라서 마르코 복음서 2장 1~12절에 나오는 중풍 병자의 치유도 죄의 용서와 관계가 있다. 풍랑을 가라앉힌 기적도 예수께서 악한 권세를 제어하신 일종의 악마 추방의 이야기다(마르 1,25; 4,39; 루카 13,16). 이렇게 말하고 보니, 기원후 1세기 사람들도 그 근본에서는 서로 공통하는 이 두 가지 기적, 곧 악마 추방의 이적과 치유 이적을 웬만큼은 구별할 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금까지의 개괄적인 관찰은 기적 이야기를 다룰 때 아무리 우리에게는 생소하다고 할지라도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을 촉구한다.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사용된 여러 가지 언어들을 정확하게 구별하면서 탐구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신학 사상을 조형성이 풍부한 용어들로 표현하는 유다계 그리스도교의 언어는 기적 이야기의 언어가 아니다. 예컨대 예수의 유혹 이야기(마태 4,1-10)는 기적 이야기의 언어에 속하지 않는다. 혼미를 헤치고 나갈 수 있는 길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여기에 문헌 비판의 기여는 특히 중요시되어야 한다.
-샤를르 페로, 예수와 역사 개정판, 박상래 옮김 (서울: 가톨릭출판사, 2012), 301-3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