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32 12. 천주교 회유책 일제가 사용한 방법 1907년 프랑스가 일본과 협정을 맺고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용인하였다.(최석우, 「일제하 한국천주교회의 저항운동(1)」, 『가톨릭신문』 1988년 3월.) 1907년 프랑스는 한국에 새로 부임하는 베랭(Berie) 영사에게 보호 상태의 국가에 주재하는 프랑스 외교관은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보호 상태의 국가가 보호하는 국가를 상대로 시도하는 행위를 어떤 이유로도 도와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주었다. 불일협약을 맺은 1907년 일제는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킨 후 정미 7조약을 강요하였다. “한국이란 나라는 이제 끝입니다”라고 뮈텔은 표현하였다. 따라서 이후 한국의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 일제를 대하는 뮈텔의 태도는 상당한 변화를 보였고, 그의 변화는 한국천주교회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당시 한국.. 2023. 11. 2. 11. 일제가 천주교를 회유한 방법 두번째 두번째 시리즈 방법 일제가 천주교 회유방법 한국천주교회가 정교분리 선교정책을 채택한 데에는 이러한 이유 외에도 선교사들의 모국인 프랑스와 선교를 총괄하는 교황청으로부터 이중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점, 한국천주교회의 박해 체험, 천주교회의 조직 특성과 신앙구조 등 여러 요인이 복합되어 있었다. 천주교회는 을 통해 정교분리원칙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교회지도부가 채택하였던 정교분리 선교정책은 교회의 정치참여 모두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존의 정치질서를 옹호하거나 정치권력을 지지하는 활동은 인정하되, 반체제적이거나 현실정치를 비판하는 것은 안 된다는 다분히 체제옹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힘의 균형이 깨진 상태에서의 불관여‧중립적 태도란 강자를 두둔하는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 2023. 11. 2. 10. 천주교 일제의 회유방법 시리즈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한 이후 일제는 한국 그리스도교계에 회유와 통제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일제가 한국 그리스도교계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한국에서 그리스도교는 국권회복운동의 온상이었고, 그리스도교학교들에서는 구국교육운동이 전개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한국의 그리스도교계를 외국인 선교사들이 관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사실상 한국의 주권이 일본에 넘어가자 재한 선교사들은 불안해 하였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은 선교사들에게 한국 통치에 대한 협력을 요구하였는데 한국천주교회의 최고 통치권자였던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도 통감 취임석상에서 조언을 부탁받았다. 뮈텔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오랜 동안 선교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였고, 많은 .. 2023. 11. 2. 9. 종교적 예수 분석 역사적관점 예수는 기적을 행하였는가? 이 질문에는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나 성경 학자는 역사가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 질문에 가부간 양자택일하여 대답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그는 자신의 학문의 원칙들을 짓밟는 결과가 될 것이다. 설혹 그 성경 학자가 철학적으로 말해서 하느님의 이례적인 개입이 존재한다는 것을 수락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시인하더라도, 그가 자기 권한과 자격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이다. 자칫하면 루르드에서 어느 치유 사실이 기적적이라고 선언하기 위해서 엉뚱하게 주교단의 권위에 호소하는 어느 의사를 닮는 꼴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경 학자는 이 의사와는 달리, 관련되는 서류를 모조리 손에 넣고 있는 것도 아니다. 설사 이.. 2023. 11. 2. 이전 1 ··· 3 4 5 6 7 8 다음